“돕는 손길” (시편30편 묵상) – 4/14/2020

우리는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남을 도우면서 남모를 기쁨을 맛본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움을 주었을 때의 뿌듯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선행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극악한 죄들이 뉴스 전면을 차지해도 보이지 않게 이웃을 돕는 손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론 돕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경험을 합니다. 순수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유도 없이 왜 도와줄까란 의심을 받게 되면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 큰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만족, 자기 우월감으로 남을 돕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면 돕는 일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저 사람은 도와주면서 왜 이 사람은 도와주지 않느냐’는 공평의 문제에 걸리면 다시는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남을 돕는 일은 그것 자체로 칭찬을 들어야 함에도 세상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냉정함을 알고 있기에 남을 돕는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도움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물론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도움 주는 일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때 도와준 사람으로부터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도와주는 것은 투자일 뿐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없이 그냥 베푸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도움 받는 입장이 되면 사회적 약자 취급을 받으면서 불편한 시선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돕는 손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도움 받는 일이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되갚아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느끼면 신앙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투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면서 더 큰 뭔가를 얻어내시려는 의도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시편 저자처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헤를 베푸소서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라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반응은 되갚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지 아니하고 주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자”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주의 돕는 손길은 따스합니다. 그 손길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