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비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답이 대표적입니다. 큰 꿈을 품는 것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꿈은 작아지고 현실은 높아지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참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에 맞춰 사는 모습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막강한 힘을 갖는 위치에 서기도 합니다. 힘을 갖게 된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일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왕은 절대 권력을 쥔 사람입니다. 시인은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할 것”이라 말합니다.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면 그가 이렇게 선한 방향으로 그 힘을 사용할 것이란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을 것”을 고대합니다.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힘을 가진 자가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한다면 그 사회는 훨씬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도울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 편에 서서 압박하는 자를 꺾는다면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유민주사회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사회적인 지위, 정치적인 권력, 물질의 부를 가진 이들과 가난하고 연약하고 억눌린 이들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시인이 기대하듯이 힘을 가진 이들이 약자를 돕는다면 사회는 훨씬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은” 존재로 힘 있는 이들이 살아간다면 사회는 훨씬 더 밝아질 것입니다.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귀를 막거나 눈을 감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도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꿈꾼다면 너무 이상적일까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셔서 한 번도 잊지 않으신 사명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힘을 이것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목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도울 힘을 갖고 있을 때 더 큰 힘을 추구하기보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해내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남을 도울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복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