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는 주님” (시편139편 묵상) – 8/14/2020

사람이 싫어서 혼자 지내는 일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만날 뿐 사적인 공간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시인의 말은 너무도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음으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라고 하는데,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시대 정신에서는 이 구절이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샅샅히 알고 있다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기 마련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다 아신다면 마치 사면이 유리로 된 집에서 사는 기분이 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알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면서 그를 다 아시는 주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통해 다른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인도하심과 붙들어주심은 부담이거나 답답함이 아니라 축복이며 활력입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최고의 행복이며 즐거움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 어둠이 덮칠 때가 있습니다. 시인도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는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에게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라고 말합니다. 흑암이 뒤덮을 수 있지만 주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의 빛이 되신다면 어떤 흑암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란 새창조의 시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인식이 그로 하여금 어떤 어둠도 이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는 인생은 새로운 길을 걷는 과정입니다. 이제는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경이로운 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란 신뢰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인생이라면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