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서 들리는 소식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선을 행하면 손해를 보고 악을 행하더라도 돈과 권력이 있으면 괜찮다는 그릇된 가치관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시인이 살던 사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들을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는” 사람들로 평가합니다. 그들은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비양심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거짓말로 여론을 형성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진실을 감추고 약한 자들을 모욕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밝히기 보다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됩니다. 약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힘있는 사람들만이 혜택을 누리는 공평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한다”고 고발합니다. 한 사람의 탈선이 아닌 집단화된 악의 형태는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약자들의 분노와 억울함에 대해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손을 잡고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킵니다.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면’ 그것에 걸린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과연 누가 그들을 막아줄 수가 있을까요? 억울하게 올무에 걸린 이들을 누가 건져줄 수 있을까요? 죄악을 꾸미는 이들의 덫을 피해갈 수가 없을 때에 과연 누구를 의지할 수가 있을까요? 시인은 개인적으로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나를 감추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쏘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불의를 들으면서 근심하고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더욱 근심합니다. 힘있는 이들의 횡포에 걸려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우리의 근심은 더욱 커집니다. 신앙은 이런 사회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력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는” 신앙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고” 있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어달라” 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쏘실 것”이란 확신은 우리의 신앙에 큰 힘을 더해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불의와 음모가 가득한 세상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 밝게 빛나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근심하는 소리를 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