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왔지만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계속해서 고통을 주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 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는 경우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극적 사건은 과거가 되었지만 현재의 삶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의 고통이 살아 움직여 오늘의 삶까지도 지배한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를 지닌 민족입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일인칭 시점으로 진술한 것입니다. 마치 한 개인이 겪은 고통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고난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우리는 구약을 통해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앗수르의 북이스라엘 침략과 바벨론의 남유다 침략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나라 잃은 설움, 이국땅에서의 노예 생활은 그들이 겪은 고난의 깊이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로 시작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입니다. 지속적인 고난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제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제 끝났다고 강대국들이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강력히 외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고 할 정도로 고난의 깊이와 충격이 대단했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패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군사력과 외교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고 이유를 밝힙니다. 엄청난 고난이 이스라엘을 덮었음에도 결코 패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전쟁터 한 가운데서 어떻게 이스라엘 위에 임했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고 당당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에 불과함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교회를 이루면서 신앙 생활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세상이 교회를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는 굴복하지 않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런 힘도 없는 것같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공동체로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전쟁터 같은 세상 속에서 교회 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갖춘다면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는 시인처럼 의연하게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