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교인들은 대화 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짧은 인사 정도만 할 뿐 실제적인 대화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교회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하지 않을까요? 대화를 기피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상처받은 경험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 없이 마음의 상처는 대화의 창을 닫게 합니다. 차라리 말 없이 교회 다니는 것이 자기 신앙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른 하나는 공감의 부족입니다. 대화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훨씬 더 활발히 일어납니다.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교인간의 공감 부족은 대화의 통로를 막고 있는 주된 원입니다.
대화의 부족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안에서도 대화는 부족합니다. 부부간의 대화,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 자녀와 자녀간의 대화의 통로가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의 말을 들을 줄 모릅니다. 남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줄도 모릅니다.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와의 대화에 어려움을 느끼는 세대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대화 부족 현상의 원인입니다.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형성되어야 할 인격이 인터넷 문화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왜곡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대화하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습니다. 사람과의 직접 대화를 기피하는 세대입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이나 개인 컴퓨터를 친구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을 친구로 삼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쏟아붓는 댓글 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교정하려는 노력은 없는 상태로 자기의 생각만을 고집스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처 받은 경험, 공감 부족, 그리고 개인주의 문화에 교회마저도 대화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대화를 포기하는 순간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가장 큰 손실은 신앙 대화의 단절입니다. 사실, 교인들은 일상적인 대화는 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대화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신앙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신앙 대화인지부터 무너진 상태입니다. 심지어 신앙 대화 자체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모세와 그의 장인인 이드로의 대화 내용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장인과 사위는 신앙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이드로는 이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은 상태입니다. 장인을 만난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그에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대화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대화입니다. 신자간에 일어나야 할 신앙 대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지금은 원인 분석 보다는 신앙 대화의 통로를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신앙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신앙적인 대화를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노력만이 아닌 교회 전체의 끊임없는 관심과 몸부림에서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화의 장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