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은혜” (시편82편) – 6/9/2020

‘법 앞에 평등’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돈, 권력, 피부, 가문에 상관없이 법의 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이런 주장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법 앞에 평등하지 못한 경험들을 사람들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경험만으로 법의 공정함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다른 요소의 개입으로 법의 공정함이 무너질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증언자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빌라도 법정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법정 공방은 일방적이었고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거짓 증언들에 대해 침묵으로 대응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억울하면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전혀 그것을 표출하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은 온갖 거짓말들만 난무한 불공정 재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는 목소리가 여기에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권력자들과 로마 지배층의 눈치를 보면서 불공평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악인의 낯’은 불공평함을 알면서도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맛대로 재판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죄를 짓고도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면제받는 일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음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관이십니다.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은 재판의 공정성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신다”는 시인의 말은 모든 인간 재판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인간 재판관들에게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면서 왜곡된 재판을 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것은 약한 자를 편애하라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역차별을 만들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이유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인 약자들인 고아, 과부, 세리,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셨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공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차별과 역차별을 철저히 배격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사회 속에서 공평한 은혜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을 공평하게 대하면서 그들 모두를 은혜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평한 은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공평한 은혜를 실천하기 어렵지만 이것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공평한 은혜를 실천할 때 잔잔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