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꿀만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발명은 수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각 분야의 발달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됩니다. 위대한 발명가, 혁명적인 사건, 획기적인 발견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위대한 발명이 항상 세상에 유익만 준 것은 아닙니다. 혁명적인 사건이 사회를 건강하게만 만든 것도 아닙니다. 획기적인 발견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다준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위대한 일로 인해 놀라운 변화들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계십니다. 그가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 정도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할” 정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란 작고 별볼일 없는 나라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주변의 크고 강한 나라와 사람들이 아닌 이스라엘이란 작은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셨습니다.
강하고 위대한 분이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약한 이들을 강하게 만들지 않으시면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약한 이들을 훈련시켜 그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도 깊이 깨달은 인물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평범한 이들을 부르시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능력자가 되고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그들 속에서 살아가십니다.
시인은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약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심에도 세상이 하나님과 그의 공동체를 우습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너무도 깊이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외심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것마저 도구로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때 생깁니다. 우리가 강해지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줄어듭니다. 우리가 인정받고 존경받고 명성을 얻게 되면 하나님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시인은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을 때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다”고 말합니다. 강해지고 싶은 것은 우리의 열망일 뿐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 약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