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시편의 가장 강력한 주제입니다. 93편, 97편과 99편은 시작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로 합니다. 하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93편은 하나님의 권위에, 97편은 땅의 즐거움에, 그리고 99편은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99편인 오늘의 시편은 “만민이 떨 것이요 땅이 흔들릴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과 자연 만물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경외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의 태도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우하지 못하는 실수입니다. 시인은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심”을 말한 후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마땅한 우리의 태도임을 강조합니다.
예배 환경을 중시하는 현대 문화에 친숙한 우리로서는 두려움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 예배당만을 생각하다보면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를 방치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 주변 상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놓치고 마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예배 분위기와 부드럽고 세련된 예배 진행에 만족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배 드림보다 예배 잘 봄으로 표현하는 우리의 말에 이런 인식이 깔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이들은 시인처럼 항상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는 인식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신앙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는 거룩하시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진정 거룩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 마음을 가득채워야 합니다.
두려움은 공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공포심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 경배하는” 일은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이에 대한 경배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갑고 냉랭하고 경직된 예배 분위기 조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예배는 뜨거운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열기가 넘치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인은 모세와 아론, 사무엘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다”고 말하면서 상호 작용이 얼마나 긴밀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응답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 한 마디 하기 어려운 예배는 기도와 응답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예배가 얼마나 사랑의 관계여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