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려면” (시편52편 묵상) – 5/6/2020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상처의 깊이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학교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같은 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받은 경험은 평생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면 가벼운 마음의 상처도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반응하는 방식도 차이가 납니다.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곧바로 항의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도 참고 견딥니다. 하지만 집에 와서 아내나 남편에게서 부당한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빠르게 반응합니다. 직장은 수직적 관계이지만 가정은 동등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자의 횡포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라면 그 횡포가 더욱 파괴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 사회일지라도 가진 자의 횡포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포악한 자’의 횡포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악한 자’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가”라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악한 계획을 자랑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나쁜 일임에도 자랑한다면 그는 진짜 나쁜 사람이거나 아무도 두렵지 않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나쁜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권력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권력에 취하면 약한 이들이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것에 무감각해집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실 것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라”는 신앙관을 드러냅니다. 악으로 악을,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권력자를 응징하기 위해 더 큰 권력을 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살아 있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한다”고 시인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라는 시인처럼 권력자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풍부한 재물을 의지하고 남을 무너뜨리면서 더욱 강해지는 삶의 방식을 거절할 수가 있습니다. 불공평함과 부당함이 사회 깊숙히 들어와 있음에도 우리는 시인처럼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하면 약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반드시 강해져야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전하고 잘되고 막힘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어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의지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이 강해지려면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